김윤식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7.11.30 조회 : 3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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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을 중심으로 추진한 개화정책의대표적 실천가이자 경제가였던 김윤식은 서기 1825년 현종 원년 광주군 남종면귀여리 청풍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경, 호는 운양이다. 운양김윤식은 인조, 효종조의 영의정과 대동법을 실시해 유명한 김육의 9대손으로 한말최대의 문장가 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보냈으며 16세때 서울로올라가 민태호, 규호 형제들과 같이 공부했고 장차 대제학감이라는 촉망을 받기도한신동(神童)이다.

그가 관직에 오른것은 31세때인 고종 2년으로 공신(功臣)과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녀를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채용한 음관(蔭官)으로임명되면서 부터이다.

고종 11년에 겨우 문과에 급제했으니 그의 나이40세였고 그후부터 김윤식은 암행어사, 승지, 순천부사로 화려한 관직에 오를 수있었다.

이러한 성장은 그당시 세도가였던 민씨의 힘에 의해서였다.대원군이 물러간후 쇄국정책이 수정되고 강화조약이 체결되는등 정세가 변화되면서정부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고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던 관인사대부층을 회유해야하는 등의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가면서 개화정책을 추구해 나가야만했다.

즉 수신사 신사유람단 영선사의 파견, 통리기무아문의 설치가 바로이러한 이유였는데 고종 18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임명되었고 이를 계기로온건개화파의 실천관료로 발전해 갔다. 영선사로 천진에 있던중 일어난 임오군란은김윤식의 영달을 가속화 시켰다. 김윤식과 이홍장의 교섭으로 대원군을 몰아냈고고종과 민비가 정권을 되찾아 김윤식에 대한 논공행상은 컸다.

그는 불과10년에 강화유수에서 공조판서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홍문관제학, 독판외무등을거쳐 정경판서로 승진했는데, 고종의 총애와 그의 영달은 반대 세력들의 공격을받아, 대원군의 재집권 주장을 주도한 민영익 일파의 정치적 책동에 의해 고종24년(1887년)에는 충청도 면천으로 정배되었다.

고종 30년에 광주 유수로임명되기까지는 김윤식은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심신의 쓰라림을 겪었다. 순탄한정치가도에서 일시나마 궤도를 달리하는 면천의 생활과 영탑사에서 김윤식이 인생의무상과 고독을 내용으로 한 야보법당전, 구음일률의 시 내용은이렇다.


달빛아래 영탑이 드높았는데
숲속은 쓸쓸하기가을같구나
절과는 일찍부터 인연깊던가
세상일 한바탕 봄꿈이로고
화성이서로가니 시설이 늦고
하늘에 북두칠성 보이지 않네
뜬구름 이제와서우습고녀
얻은것 촌사람의 대감소리


김윤식이 정치가로서보다 한문장가로 높이 평가받는 것도 면천 귀양시절에 닦은 시자활동에서 문장력의 원숙을더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소용돌이 속에 급변한 정세는 김윤식의 등장을부채질했다.

외무대신의 자리를 맡은 김윤식은 중도의 자세를 취하려고애썼으나 시의를 매섭게 끊지못하는 유약한 성격으로 일본강요에 이루어진갑신개혁의 입안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했고 조일 잠정합동 조관, 조일맹약 3조등의체결등 국권이 잠식당하는 굴욕적인 조약들의 참여와 을미사변의 동조, 민비사건등외무대신으로서의 책임을 면할수 없다는 일부세론에 밀려 끝내 고종 34년종신유형의 몸이되어 제주도 귀양길에 올랐는데 이것이 두번째의 정배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면되어 제주 정배에서 풀려난 김윤식은 72세나이에 김가진, 유길준과 함께 홍사단을 조직하고 신교육에 뜻을 두어민중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때에 피임된 중추원 의장직이 후에 정치가로서의 평을옳게 받지 못한 결과를 빚어냈다.

홍사단을 조직했던 김가진과 한때대한민보라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던 김윤식은 대제학에 오르고 한일합방이라는국가운면의 중대사를 앞에 놓고 개최된 수의 (지금의 국무회의)에서『불가불가』(不可不可)로 합방의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불가불가』는 김윤식의 유약한 정치자세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불가불가』의 『어쩔수 없으니 해야한다』의 뜻으로 합방에 찬성했다고 몰아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현세 정치인 들에게도 올바른 정치관을 피력하고 행동해야하는 교훈을 남겼다 할 것이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한 친정노선의 길을걷게했고 유약한 성격이 시의를 저버리지 못하고 친일의 인상을 깊게 하였지만 그의공과를 탓하지 못함은 무슨 연유일지 거센 외세의 몰아닥침에서도 청의 이홍장과그리고 시의에 따라 맺어진 이등박문과의 친교는 정치적 수단보다는 그의 뛰어난문장이라고 사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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