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리(酸梨里)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02.13 조회 : 2001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마을의 배나무에서 따는 배가 신맛이 많다고 하여 '신배골'이라고 불러오다가한자로 표기하기를 '실 산'(酸) '배 이'(梨)자를 붙여 '산이리'(酸梨里)라고 부르게되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는 초월면 산이동(酸梨洞)이라고 하였다.

산이리 1번지에서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지석묘(支石墓)가발굴되었으므로, 이 마을에는 아주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지석묘는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마을 뒤로는 산이 울창하고, 마을 앞은 농경지가많으며, 곤지암천에서 농업용수를 확보하여 풍요로운 농사를 지어 왔다.점말ㆍ비선거리ㆍ신뱃골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앞으로는 3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좋으며, 실촌읍 삼리와 경계를 이루고있고, 초월읍의 남쪽 끝이 된다.

마을의문화유산

조선백자도요지
이 마을에서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지석묘(고인돌)가 발견되어 현존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 신뱃골에서는 15~16세기에조선백자를 굽던 도요지가 발굴되었다. 상감(象嵌) 백자(白磁)를 굽던 곳으로대접ㆍ접시ㆍ잔이 발굴되었다.

점말 - 독점
1930년 경에 이 곳에서항아리를 굽는 점토가 출토되어 항아리를 굽는 공장이 생김으로서 마을 이름이'독점' 또는 '점말'이라고 부르게되었다.

무세비거리(비선거리)
조선시대 광주유수 조상진(趙尙鎭)의선정비(善政碑)를 무쇠로 만들어 세워 '무쇠비거리'가 변하여 '무세비'가 되었다.비가 서있는 곳이라 하여 '비선거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 관헌이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쇠붙이를 강제 징수할 때 이비석마저 철거하여 가져갔으므로 지금은 비석이없어졌다.

신뱃골(씀배골)
이 마을에서 예전에 배맛이 신 것이 생산되어붙여진 이름이다.

비렁뱅이들
산이리와 실촌읍 삼리(三里) 사이에 있는논들을 말하는데, 수렁논이 많아서 벼가 잘 되지 않아 헛농사만 짓게 되어빌어먹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잔다리말
예전에 산이리 뒷산에서흘러내려오는 산이천을 건너다니기 위하여 작은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몇 가구가 살던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이천
산이리 마을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을 말한다.

상봉(산)
산이리 뒷산에는말바위ㆍ쌀개바위ㆍ서울봉이 있는데, 이 산줄기는 백마산에서 내려왔다. 이 산줄기의 맨 위의 봉우리를 '상봉'이라고 부른다.

두루봉
상봉으로올라가는 좌측에 있는 산봉우리를 말한다. 예전에는 이 곳에 농가가 살았다고한다.

정개산(鼎蓋山)
산이리와 실촌읍 삼리의 뒷산을 말한다. 산의형세가 높고 빼어나다. 마치 솥뚜껑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대화산(大華山)의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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